런던 지하철 폭염 (고심도 노선, 냉방 열차, 기후 적응)
지난달 런던 지하철 피카딜리선 객실 바닥 온도가 40도를 찍었다는 열화상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저는 이 뉴스를 보자마자 "신사의 나라가 에어컨도 못 다느냐"는 반응이 먼저 나올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의 구조 문제가 깔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 고심도 노선, 왜 에어컨 하나 못 다는가
피카딜리선은 1890년대에 런던의 점토 지반을 실드 굴착 공법으로 뚫어 만든 노선입니다. 실드 굴착 공법이란 원통형 굴착기를 지반에 밀어 넣으면서 터널을 뚫는 방식으로, 당시 기술로는 최선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터널 직경이 열차 폭에 딱 맞을 만큼 좁게 만들어졌습니다. 런던 지하철에서는 이런 구간을 고심도 노선(Deep-Tube Line)이라고 부릅니다. 고심도 노선이란 지표면에서 수십 미터 아래를 달리는 노선을 뜻하며, 전체 런던 지하철 노선의 약 60%를 차지합니다. 문제는 이 좁은 터널 구조가 냉방 장치 설치를 사실상 막고 있다는 점입니다. 열차 외벽과 터널 벽 사이 공간이 너무 좁아서 기존 방식으로는 냉방 유닛을 붙일 자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피스톤 효과(Piston Effect)라는 변수까지 더해집니다. 피스톤 효과란 열차가 터널 안을 고속으로 통과할 때 공기를 압축하며 밀어내는 현상으로, 출퇴근 시간대 수백 대의 열차가 반복적으로 터널을 오가면서 주변 토양에 열이 쌓이게 만듭니다. 냉방 장치를 달면 열차 내부는 시원해지지만 그 열이 터널 안에 더 빠르게 축적되는 역설이 생깁니다.
제가 이 구조를 처음 파악했을 때, "왜 안 하냐"가 아니라 "이걸 어떻게 하냐"는 질문이 먼저 들었습니다. 냉방 열차를 넣으려면 열차 설계만 바꾸는 게 아니라 터널 환기 시스템, 전력 공급망, 신호 체계, 차량 기지 설비까지 함께 손봐야 합니다. 런던 교통 이용자 단체(London TravelWatch)가 "피카딜리선 냉방 열차는 하루라도 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배경도 여기 있습니다. 단순한 차량 교체가 아니라 복합 인프라 투자이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현재 런던 지하철에서 냉방 장치가 달린 열차는 약 190대인데, 이들은 모두 디스트릭트선·서클선 같은 저심도 노선에서만 운행 중입니다. 가장 최근에 도입된 냉방 차량도 2017년 투입분입니다. 제가 직접 찾아보니 저심도 노선은 지표 가까이 달리기 때문에 터널 단면이 상대적으로 넓고 환기가 쉬워 냉방 설비를 붙이기 훨씬 유리한 구조입니다.
## 피카딜리선 신형 열차, 해결책인가 시작점인가
올해 말부터 피카딜리선에 독일 지멘스가 제작한 신형 냉방 열차가 순차 투입될 예정입니다. 고심도 노선에 냉방 열차가 들어오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신형 차량은 소형화된 냉방 유닛을 객차 하부에 배치하고, 기존보다 바퀴 수를 줄여 확보한 공간에 냉방 설비를 집어넣는 설계를 채택했습니다. 좁은 터널 문제를 차량 설계 자체로 우회한 셈입니다. 그런데 당초 운행 개시 시점은 지난해 12월이었습니다. 시험 운행 과정에서 여러 기술적 문제가 발생하면서 일정이 올해 12월로 밀렸습니다. 저는 이 지연이 단순한 행정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차량 한 대를 시험할 때 신호 시스템, 차고지 정비 설비, 전력 공급 안정성이 동시에 검증되어야 하는데, 이 중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일정이 통째로 밀립니다. 제 경험상 이런 복합 인프라 프로젝트는 계획 단계에서 드러나지 않는 변수들이 실제 시험 단계에서 한꺼번에 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큰 문제는 피카딜리선 이후입니다. 런던교통공사(TfL)는 베이컬루선, 센트럴선, 워털루 앤드 시티선에도 냉방 열차를 도입할 계획이지만 관련 예산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노던선과 주빌리선은 교체 일정조차 잡히지 않았고, 2009년부터 2011년 사이 투입된 빅토리아선 차량은 앞으로 수십 년간 그대로 운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후변화로 폭염이 더 자주, 더 강하게 반복될 것이라는 점은 과학계의 일관된 전망입니다([출처: 영국 기상청](https://www.metoffice.gov.uk)).
TfL이 예산을 못 잡는 이유도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승객 수입 회복이 더디고, 중앙 정부의 장기 지원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기관사 노조 아슬레프(Aslef)는 과거 정부의 투자 부족을 직접 지목하며 "기후변화 시대에 높아지는 기온에 대응하는 대중교통 투자는 런던의 미래를 위해 필수"라고 밝혔습니다. 저는 이 주장이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인프라 투자는 효과가 수십 년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에, 정치 사이클 안에서는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리기 쉬운 구조입니다.
런던 지하철 냉방 문제를 정리하면 결국 세 가지 층위가 겹쳐 있습니다.
- 19세기 터널 설계가 남긴 물리적 제약 (좁은 단면, 피스톤 효과에 의한 열 축적)
- TfL의 재정 압박과 중앙 정부의 장기 지원 부재
- 기후변화로 빨라지는 폭염 주기와 그에 뒤처진 투자 속도
이 세 가지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차량 한 대 바꾸면 된다"는 해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영국 내에서도 학교·병원·교통망 전반에 폭염 피해가 잇따르면서 기후 적응 인프라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습니다([출처: Financial Times](https://www.ft.com)).
결국 런던 지하철 에어컨 문제는 "왜 선진국이 이런 것도 못 하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래된 도시일수록 인프라 교체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기후변화가 그 청구서를 훨씬 빠르게 들이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울 지하철도 지금은 냉방이 당연하지만, 만약 1890년대에 지어진 터널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겁니다. "한국은 되는데 왜 영국은 못 하냐"보다 "19세기 도시가 21세기 기후에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는가"를 보는 시각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피카딜리선 냉방 열차 도입이 올해 말 예정대로 이뤄질지, 그리고 그 이후 예산 확보가 실제로 이어질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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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news.nate.com/view/20260708n10548?mid=n0500
